도요토미 히데요시 (1537-1598)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의 장수입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전국시대 장수가 되어 천하통일을 이루어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오와리국 아이치군에서 아시가루라는 최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젊은 시절의 이름은 기노시타 도기치로입니다. 재산도 없고 집안도 좋지 않아 바늘팔이를 했는데 성격이 애교가 많고 재치가 있으며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출세욕과 장사꾼의 감각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후에 아시가루로 오다 노부나가를 모시면서 타고난 기지로 전공을 쌓아 올립니다. 차츰 노부나가에게 중용되면서 1573년 기타 오미를 부여 받고 나가하마성의 성주가 됩니다. 37세 무렵부터 도기치로 대신 하시바 히데요시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됩니다. 1579년 이후 주고쿠지방의 모리 씨에 대한 공격의 선봉장으로 활약하던 중 1582년 주군 노부나가가 교토 혼노지에서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교토로 돌아가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츠히데를 칩니다. 히데요시는 이러한 공으로 노부나가의 후계자 지위를 얻어 오사카성을 축성했습니다. 1585년에는 관백, 이듬해에는 태정대신이 되어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라는 성’을 하사 받았습니다. 이후 오츠 100척 선박을 결성하여 호수교통에 대한 지배를 천하통일의 발판으로 삼았고, 시코쿠, 규슈 평정에 이어 1590년 간토, 오우를 평정하며 마침내 천하통일을 이루어냅니다. 도요토미 정권을 수립한 뒤 토지조사인 다이코 검지와 무사 이외는 칼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는 가타나 가리 명령을 통해 병농분리를 완성시켜 근세 봉건사회의 기초를 확립했습니다. 두 번에 걸친 조선 출병이 결국 성과를 내지 못하고 1598년 후시미성에서 생을 마칩니다.

오츠와의 관련성으로는 히데요시가 1595년 영지와 재산을 몰수하는 명령을 미이데라에 내립니다. 미이데라의 당과 탑은 순식간에 해체되어 엔랴쿠지와 후시미성으로 이축됩니다. 그러나 후에 히데요시의 정실인 기타노 만도코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재건, 재이축 됩니다. 또 오츠에는 히데요시와 관련이 깊은 신사, 지하수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일반 관람
오츠성 터, 우마가미 신사, 네리누키노 미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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